간혹 주위에서, “영어 선생님 해도 되겠어요” 라는 말을 듣고는 합니다. 특히 학원강사 − 전과목 지도경험이 있지만 주로 과학을 가르쳤습니다 − 로 있을 때, 영어강사들로부터, 또는 학생들로부터 그런 반응이 나오더군요. 그래서, 어떤 경우는 근무했던 학원내의 고등학생이, 영어강사 대신에 저에게 영어독해 문제를 질문해 오는 해프닝이 있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반발을 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대입기간 중 영어공부는 거의 내팽개치다시피 했습니다.
하지만, 영어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영어 하면 할 말은 꽤 많습니다.
여기서 영어에 관한 지표를 조금 소개할까 하네요.
수능 외국어영역(영어)의 점수는 80점 만점.
5개월의 수능대비 재수기간동안 50여종의 수험서 중 영어문제집은 불과 5권.
그 이외의 영어공부는 관심분야의 영어권 사이트 웹서핑, BBC 방송 시청 등. 그리고 서울대 최종합격후 신입생 텝스(TEPS)특별시험까지 기출문제집 한 번 풀어 본 것이랑 어휘 익히기가 전부였습니다. 그래도 첫 시험에TEPS 831점을 기록하였으며, 영어원서 사용에 문제가 있거나 영어시험에 스트레스를 받아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면, 땃쥐는 영어천재다? 절대 아닙니다!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이다? 그것 또한 아닙니다. 더구나 저는 해외생활경력도 없습니다.
비결은 중학교 2학년이 다 끝나가던 1991년 겨울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어릴 적의 저는, 교통기관을 엄청나게 좋아하던 소년이었습니다.
틈만 나면 집 뒤의 언덕에 올라가서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나, 경부선을 지나는 열차들을 구경하곤 했습니다. 특히, 고속버스와 창문 큰 열차 − 새마을호나 무궁화호 등, 간이역에는 서는 일이 없는 특급열차들 − 을 좋아했습니다. 어릴 때의 소원 중의 하나가 창문 큰 열차 타 보는 것, 그리고 장래희망도 교통에 관련된 직업인 버스 운전수나 열차 기관사 등이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자동차의 앞뒤에 붙어있는 영어 글자에 눈길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자동차나 열차 등의 탈것을 좋아하는 저에겐 이런 취미까지 있었어요. 엔진소리를 듣고 차종을 알아 맞추는 건데, 자동차의 모델명을 나타내는 글자는 많이 봐서 외웠는데 저게 무슨 뜻인지, 어떻게 읽는지는 알 수 없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었어요.
영어글자들을 어떻게 읽을까…그래서 형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형은, 기본적으로 각 알파벳이 어떤 소리가 나는지의 대강을 가르쳐 주고, 통칭 빨간기본영어라는 책을 보라고 했습니다. 책이 상당히 낡고 조잡해 보여 읽기는 싫었지만, 다른 부분은 전폐하고 발음기호 부분만 뚫어지라 읽었습니다. 그 뒤로는 영어사전의 발음기호는 혼자 읽을 수 있게 되어 문제가 되질 않았습니다.
1990년.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형은 대뜸 맨투맨기본영어를 보라고 했습니다. 당시는 중학교부터 영어를 배우던 때. 영어교과서는 알파벳부터였던 그런 상태였습니다.
형은 당시 고등학교 2학년. 중학교 때부터 영어과목의 부진으로 고생하여, 영어에 철천지 한이 맺힌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동생에게만큼은, 영어부진의 전철을 밟게 하고 싶지 않았나 봅니다.
주의사항을 들었습니다. 공부한다는 감각이 아니라 소설책을 읽는다는 감각으로 읽어나가야 한다고.
그렇게 해서 1990년이 끝나갈 때까지, 맨투맨기본영어 2권을 모두, 13회 정도 읽어낼 수 있었답니다. 그 다음부터는 영어교과서를 읽어나가는 것만으로도 내신은 물론 대외시험 영어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져 공부가 편해지더군요.
1991년 겨울. 당시 유행하던 눈병은 결국 저에게도 반갑잖은 손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추운 겨울날, 눈병 때문에 눈도 잘 안 보이는데 대구시내의 병원까지 통원하기란, 겪어보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그 때의 후유증인가 이후 건강이 악화되려면 시력부터 떨어지더군요.
통원치료로 조금씩 시력이 돌아온 이후, 형은 성문구문연구라는 영어독해집을 공부하라고 했습니다. 수준은 고등학교 2학년 정도. 양은 상당히 많았지만, 짧은 문장 중심으로 엮어져 있어 겨울방학 내에 다 보기에는 무리가 없었습니다.
눈병 때문에 그 때는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이 방 안이었습니다. 그래서 눈에 부담을 줄이려면 아무래도 책을 보는 것이 유리했습니다. 그래서 성문구문연구를 끼고살다시피 하고, 그 이외의 시간은 수학, 과학 등 나머지 과목에 주력했습니다. 중학교 1, 2학년 때 영어 이외는 공부를 거의 안해서 2차다항식의 인수분해조차 힘들어하는 심각한 상태여서, 특히 수학을 공부하는 시간은 형으로부터 핀잔듣는 시간이었지요.
1992년. 형은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나이는 네 살 차인데, 신분상으로는 중학생 대 대학생!
안 그래도 형의 말은 법이었는데,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말할 나위도 없지요.
그런데, 형에게 최초로 반발하는 뜻을 내비쳤습니다.
대뜸 성문종합영어를 사와서는, 오늘부터 연말까지 독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앗, 성문종합영어라니!
정통영어수험서의 대명사! 실력좋은 고3조차 쉽게 공부하기 힘든 그 책!
영어를 확실히 공부하고 싶거나 확실히 망치고 싶은 사람만 보라는 바로 그 책!
눈앞이 깜깜해졌습니다.
자칫하다가 영어에 흥미를 다 잃어버리지 않을까, 무리수를 두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제 중3에 지나지 않는데, 성문종합영어를 연내에 다 보라니! 형이 제정신으로 저러나, 영어에 대한 화풀이를 어디에다 하는 걸까 등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형 지금 돌았나? 중학생한테 무슨 성문종합…”
앗, 해서는 안 될 말을 해 버렸습니다. 형이 용돈을 쪼개서 사온 책에 대해 감사의 말을 못할 지언정, 불평부터 하다니…형은 강한 어조로 말을 맺었습니다.
“잔말 말고 연말까지 다 봐!”
‘형의 깊은 뜻이 있는데 이러는 나는 동생실격…’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 성문종합영어를 시작했습니다. 되든 안 되든 부딛쳐 보자, 인간이 쓴 책인데 못 읽을 것도 없지 하며 보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해설서가 필요했지만, 2과를 끝내고 3과에 접어들 때부터는, 거추장스러워서 해설서를 더 이상 안 보기로 했습니다. 모르는 단어는 어휘해설보다는 사전을 활용하는 쪽으로 방침을 정했음은 물론이지요. 노력과 시간이 더 필요하지만, 동생으로서 적절치 못한 말을 한 데 대한 사죄의 마음도 있었기에 일부러 어려운 길을 택한 것이었지요.
성문종합영어를 반 정도 정독했을 때인 1992년의 여름, 형이 영영사전이란 것을 사 왔습니다.
외국에서 만들어진 책을 그 때 처음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는 영영사전으로 옮겨갔습니다.
지금도 보관되어 있는 저의 성문종합영어의 여백에는 어휘해설이 빼곡이 둘러차 있습니다. 입추의 여지가 없다는 그 표현이 적확하지요.
일단 문법은 대충 읽고 넘어갔고, 단문독해, 장문독해, 어휘를 먼저 보았어요. 영어는 실탄, 즉 어휘습득량이 많으냐 적으냐로 판가름나기 때문에 우선순위를 그렇게 두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입시경향문제, 문법, 작문 순으로 진전시켜 간 거예요. 그렇게 해서 한 과를 끝내는데 평균 2주 가량 걸리다가, 후에는 열흘, 1주 정도로 점차 속도가 진전되었습니다. 그리고 책 여백에 쓴 것과는 별도로, 대학노트 한 권을 이용하여 정성껏 단어장을 만들어 갔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저의 필기감각에 맞는 로마자 서체를 정립할 수 있었구요.
결국 우여곡절 끝에, 예정보다 일찍, 1992년 11월을 며칠 앞두고 성문종합영어 완독작전은 완료되었습니다.
그 다음 단계. 형이 대학교 도서관에서 대기업의 입사시험, 대학원시험 영어문제를 복사해 와서 풀어 보라고 했습니다. 당시는 신문에 학력고사 대비문제가 연재되기도 해서, 학력고사 영어문제도 풀어 보았습니다.
결과는? 입사시험이나 대학원시험은 80% 이상, 학력고사는 90% 이상의 정답률을 기록했던 것이었습니다.
형은 그런 저를 보고는, “이 땃쥐가! 영어시험 만으로는 지금당장 뭐라도 하겠다!” 라 찬탄을 금치 못하더군요.
저는, “형의 선견지명 덕분이지! 정말 고맙다.” 라고 답례했습니다.
고등학교 입학 후, 영어 덕분에 이미지 개선을 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미리 밝혀 둡니다만 저는 꽃미남과는 거리가 있는 스타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천하의 추물이라는 것도 결코 아니지만, 한 눈에 호감이 가는 스타일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긴머리일 때는 이야기가 다르지만, 중고생 때나 군인시대 등, 짧은머리일 때는 인상이 과히 좋지는 않았습니다. 요즘은 긴머리를 하고 있으니까 이야기가 다르긴 해요. 최근 헤어스타일에 이른바 샤기컷을 적용하여 미소년 분위기를 연출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영어시간, 영어선생님이 저의 이름만 알고 얼굴을 모르던 때, 출석부를 보며 저의 이름을 거명하며 질문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학교 내에서, 주목할 만한 학생으로 알려져 있기는 했지만 실제로 저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반내에는 동명이인도 없었으니까 제가 대답할 수 밖에요. 그런데 영어선생님이 아주 노기어린 표정을 지으면서 하시는 말씀이, “왜 네가 대답하는데? 너, 이상민이야?”
왜 내게 화내지? 이상하다 생각하면서 대답했습니다.
갑자기 반내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고, 웅성거리는 분위기가 이어졌습니다.
‘내가 내 이름을 말하는게 죄인가…? 세상에 별 희한한 일도 다 있네!’
“예. 저 1학년 7반 38번. 이상민 맞는데요.”
이런, 홍길동은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해 한이 되었다는데, 도대체 저는 저의 이름이 있어도 그 이름으로 불리지 못해 한을 품어야 된다는 말인가요? 그런 생각에선가 저의 이름을 밝힐 때, 약간 액센트를 넣어 말끝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자, 영어선생님의 표정에서, 당황하는 표정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 이상민이라는 이름의, 주목할 만한 학생이 입학했다기에 아마 저를 전형적인 모범생 또는 귀공자 타입으로 예상하고 있었나 봅니다. 그 예상이 무참히 어그러진데 대한 실망감에서일까, 아니면 학생을 지나치게 추궁해 버린 데 대한 실책에서일까. 아무튼 교실의 공기는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이후, 그 영어선생님이 수능기출문제를 내어 주시면서, 풀어 보라고 했습니다. 점수는 40점 만점에서 38. 2를 기록.
그 영어선생님은, 깜짝 놀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과목은 모르겠지만, 영어는 확실히 서울대 갈 실력이다!”
그 뒤로는,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저의 사례를 들어가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영어는 이상민처럼 하면 100% 통한다. 영어를 잘 하고 싶으면 나보다는 이상민에게 물어보는 게 낫다.” 라고 말이죠.
지금도 남아있는, 제본이 갈라지고 손때가 묻은 누더기 성문종합영어. 12년 전의 저의 하루하루가 담겨진, 무언의 일기장이자 바꿀 수 없는 보물입니다. 펼쳐보면, 전반의 여백은 영한사전식, 후반의 여백은 영영사전식 단어해설로 빼곡이 들어차 있고, 책의 옆면이랑 모서리는 손때가 묻어 반들반들해져 있습니다. 위편삼절까지는 아니지만요.
학원강사 시절, 같은 학원의 동료 영어강사가, 성문종합영어를 갖고 있으면 빌려달라 해서 그 누더기 성문종합영어를 빌려준 적이 있습니다. 이에 앞서, 중고생 때 어떻게 공부했는지 체험담을 들려달라는 학생들의 요청이 있어, 체험담을 들려주며 그 누더기 성문종합영어를 회람시킨 적도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영어 선생님 해도 되겠어요” 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이지요. 그 성문종합영어가 누더기가 되도록 정독한 고생이 있었기에, 완독 후 11년, 고교졸업 후 8년이 지난 2003년, 특별히 다른 공부 없이도 영어 만점이 가능했던 것은 아닌가, 돌아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성문종합영어 완독작전에서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부동의 굳건한 실력을 구축하려면 남보다 몇 배 이상 앞서가고, 몇 배 이상 땀을 흘려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비약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상식과 통념을 넘어서는 용기와 결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형의 성문종합영어 강권, 무리수였다고 생각되었지만 결국 형의 판단은 옳았고, 그 결과 저는 영어에 관해서 최소한 스트레스는 받고 있지 않습니다. 형에 대한 고마움과, 그 때의 실언에 대한 사과의 마음을 이 자리를 빌어 전하고 싶군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에 무리수라고 여겨지던 것이 후대에 가서야 선견지명으로서 인정받는 것이 있습니다. 그 한 예를 언급할께요. 철도관련 서적에서 일본 오오사카(大阪) 시내의 JR西日本(서일본여객철도 : West Japan Railway) 고가철도 중 상당 부분이 이미 쇼와(昭和) 초기, 즉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에 걸쳐서 만들어진 것임을 알고는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과잉투자다 해서 비난의 목소리도 있긴 하였지만, 현재는 철도공학자의 선견지명으로 교통문제의 발생을 미연에 방지한 모범사례로 손꼽히고 있기도 합니다. 철도문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저이긴 하지만, 과연 그 때의 일본국철 기술진의 선견지명에 반분이라도 따라갈 수 있을까 두려운 마음이 드는군요. 그리고 독일의 기상학자 베게너(A. Wegener)의 대륙이동설은, 비록 베게너 자신이 지질학자가 아니었고 대륙이동의 원천을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화석과 퇴적층의 특성을 고찰하여 자신의 전공인 기상학을 적용, 고기후(paleoclimate) 분포와 대륙이동을 접목시킨 것은 전대미문의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영어에 고생하지 않는 저를 만든 형의 생각이, 앞에서 든 두 사례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탁견이었이며, 그와 동시에 상식의 틀 안에 갇혀있던 어리석은 동생인 저를 깨우치게 한 원동력이었다고 자부합니다.
또한, 저는 여기에서 더 한번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군요. 언어방면에서 좋은 공부방법을 개발해 놓고도, 수리방면, 특히 수학에서 효과적인 방법을 미처 개발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후회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과정 덕에 제가 여기서 이렇게 체험담을 들려 드릴 수 있는 입장이 되긴 했지만, 지난 날 치루었던 대가가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제 사례를 거울삼아, 부디 언어방면 과목과 수리방면 과목 모두에서 강한 수험생이 되시길 바랍니다. 진정한 국사무쌍(國士無雙)의 지향하는 바가 문무양도(文武兩道)이듯이, 수험생의 근원적인 힘은 문리양도(文理兩道)에서 나온다는 점 기억해 주세요!